IT엔지니어에서 헌책방 운영 윤성근

박원순 서울시장 집무실 디자인하는 윤성근씨의 심야책방 풍경

박원순 서울시장은 여길 어떻게 찾았을까.

홈페이지의 약도는 6호선 응암역 3번 출구로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된다고 설명한다. 그 설명을 그대로 믿는다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약도에는 주변 건물만 표시돼 있다. 정작 목적지는 약도에 나오지 않는다. 스마트폰 지도 어플에서 목적지 주소를 입력했다. 목적지를 알리는 붉은 점은 서울서부경찰서에 멈춰 있다. 경찰서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보이지 않는다. 가게라면 당연히 붙어 있어야 할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헌책방이라면 으레 있게 마련인 길가의 책더미도 보이지 않는다. ‘찾기 힘든 곳’이라는 사전 정보를 떠올리고 온 신경을 집중해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경찰서 맞은편 작은 건물 1층 입구에 B5 용지 크기의 안내문이 한 장 붙어 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여깁니다.’ 바로 옆 일식집 간판에만 눈길을 주면 결코 찾을 수 없는 위치다.

박 시장이 처음 이곳을 찾아왔다는 2008년 무렵이면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전이다. “처음 왔을 때 두 시간 동안 헤맸다”는 이 책방 한 단골손님의 말은 과장이 아닐 수도 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으로 가는 길은 미로다. 길이 너무 복잡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갈팡질팡 헤매게 만든다는 뜻에서 미로다. 너무 특이해서가 아니라 너무 평범해서 그렇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평범한 동네의 평범한 건물 지하 1층에 있다.

그러나 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건물 지하의 문을 열면 완전히 색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다. 아니, ‘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들’이라고 해야 맞다. 다른 언어, 다른 판본으로 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200여권이 서가에 꽂혀 있기 때문이다. 책방 이름은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이 1865년에 발표한 이 유명한 소설에서 나왔다. 책방 주인 윤성근씨(36)가 가장 공들여 모으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19세기 유럽 살롱 본떠 책방 구성

지난 10일 오후 7시쯤 윤씨는 책방 중앙에 배치된 4개의 테이블 중 한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 현대철학의 모험 > 이다. 그가 ‘이상북'(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을 줄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책방은 외양으로만 보면 헌책방이라기보다는 북카페에 가깝다.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모든 책들은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 있으며, 한쪽 귀퉁이에는 서너명이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돼 있다. 생협조합원이기도 한 윤씨는 손님이 주문하면 생협 재료로 만든 음료도 내온다. 지난 2007년 이곳에 책방을 냈을 때 그가 머릿속에 구상하고 있던 책방의 모습이 19세기 유럽에서 창조적 예술가·지식인 무리들이 글을 쓰고 토론을 벌이던 살롱이었다고 하니, 북카페 형태의 헌책방은 정해진 귀결이었을 터다.

박 시장이 이곳을 찾은 때는 그가 마을공동체에 관심을 기울이던 희망제작소 시절이다. 박 시장은 마을공동체에 관한 아이디어를 수혈하기 위해 영국, 독일, 일본을 돌아다녔다. 한국에서도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았다. 서울시 은평구 응암동에 2007년에 문을 연 독특한 헌책방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윤씨는 그때 맺은 인연으로 박 시장이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로 일하던 무렵 그의 집무실을 디자인했다. “상임이사 사무실이 넓지 않은데 워낙 책이 많으니 와서 한 번 정리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까닭이다. 그 인연이 확장돼 요즘 윤씨는 서울시장실 집무실 디자인을 맡고 있다.

1차 작업은 13일쯤에 끝난다. 그보다 빨리 끝낼 예정이었지만 기성품 대신 서울시청사에서 놀고 있는 책장을 활용해달라는 박 시장의 주문에 맞추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다고 윤씨는 말했다. 20여평 규모의 시장 집무실에는 최대 3000권의 책이 들어가게 된다. 이상북에는 30여평 규모에 5000권의 책이 있으니, 주어진 공간을 활용해 최대한 많은 책을 손쉽게 찾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는 셈이다.

윤씨는 시장실 한쪽 면에 걸려 있던 대형 그림을 떼냈다. “그림이 하나 걸려 있기에 떼내기로 했는데, 알고보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여한 아주 비싼 그림이더군요.” 이제 그 자리에는 대안학교인 은평씨앗학교 학생들이 작업하고 있는 벽화가 차지하게 된다. 시장실의 다른 한쪽 벽은 서울시민들이 박 시장에게 바라는 말들이 적혀 있는 포스트잇들이 차지한다. 그러니 더더욱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책도 책이지만 자료가 아주 많아서 바퀴 달린 이동식 서가를 쓸 생각”이라고 윤씨는 말했다.

‘모든 이에게 열린 공간을 지향’

어린 시절 윤씨는 ‘활자중독’이었다. 책은 물론이고 글씨가 있는 것이면 그것이 성경이든 전화번호부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책을 읽기 힘든 밥상머리에선 껌종이에 쓰인 글씨라도 읽었다. 책과 활자를 열망하고 사랑했지만 인문계고등학교 대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빨리 학교를 졸업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컴퓨터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한 IT업체에서는 일중독에 빠졌다. 휴일에도 나와서 일을 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에도 축구경기를 보지 않았다.

서른 즈음이었다. “누군가 내게 당신의 20대는 어떠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신발밖에 없는 것일까. 어느날 그런 허망함이 찾아왔어요.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찾기로 했죠.” 한 달 후 사표를 냈다. 그 뒤 그는 자신만의 굴을 파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팍팍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에서 앨리스는 토끼를 쫓아가다 토끼굴에 떨어지면서 낯설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그가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을 그리로 초대하기 위해 파놓은 토끼굴인 셈이다. 그 토끼굴이 일반서점이 아니라 헌책방이 된 것은 “내가 읽은 책만을 판다”는 원칙 때문일 것이다.

책방 귀퉁이 무대에선 가끔씩 공연을 한다. 장르 구분 없는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공연이다. 매달 둘째, 넷째주 금요일 밤에는 책방 문을 밤새 여는데, 자정엔 반드시 공연을 한다. 평일에는 많아야 하루 10명인 손님들이 이날만큼은 두 배 이상 늘어난다. 이른바 ‘심야책방’이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무한 열린 공간을 지향한다. 동네 사람들이 체육복 차림으로 찾아와 차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대화도 나누는 어울림과 소통의 공간이다. 윤씨는 그처럼 일상 속에 평범하게 스며드는 것이 진짜 문화라고 생각한다. 오후 9시쯤 윤씨는 시청 근방에서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책방 문은 밤 11까지 연다. 그렇다면 책방은 누가 지킬까. 친구와 함께 책방에서 30분째 이야기를 나누던 단골손님이 자연스럽게 카운터 자리에 앉았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선 흔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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